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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금강산

봉 선 화 2008. 11. 19. 11:13

  • 글쓴이: 봉선화
  • 조회수 : 54
  • 07.06.22 16:14

“그리운 금강산”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꿈속에서나 그려 볼 수 있었을까 살아생전에는 금단의 땅, 북녘에 있는 금강산을 가 볼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못하고 살았었다. 하지만 세월이 좋아졌는지 금강산은 관광코스가 되어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갈수 있는 곳이 되었다.


천하절경이라는 금강산구경도 하고 내 나라 내 동포가 살고 있는 북녘 땅도 한번 밟아봐야지. 하고 오래전부터 꿈꿔 왔으나 연세 높으신 어머니를 모시고 있어 쉽사리 여행계획을 잡을 수가 없었다.


어렵게 2박3일 일정으로 5월 29일 떠나는 금강산 여행신청을 하게 되었는데 시어머니가 갑자기 다리가 불편하다며 걷지를 못하고 자리에 눕게 된 것이다.


병원을 찾으니 척추 디스크 통증으로 인해서 그렇다며 주사 한대 놓아주고

안정을 취하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90순을 넘긴 노인내라 회복 빠르지 않고 여행날짜는 하루하루 다가오고 조바심이 났다.

편찮으신 어머니를 두고 여행을 떠나기도 그렇고 이미 돈을 다 지불한 여행길을 포기하기도 그렇고 결정을 내리기가 싶지 않았다.


‘꿈속에서도 그려보며 손꼽아 기다렸던 날이었건만...’


그렇게 떠나는 전날까지 마음으로 갈등하면서 29일 시계를 새벽4시로 맞추어 놓고 잠자리에 들었지만 잠도 오지 않았다. 밤새 뒤척이다 얼핏 잠이 들었던지 깨어 보니 4시 50분이 임박해 있었다. 그 시간은 벌써 당감동 사거리에 집결장소에 있어야 할 시간이었는데 .

..

엉겹 결에 챙겨놓은 가방 들고 약속장소로 달려가 보니 다행이 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부산을 출발하여 대여섯 시간 동안 동해안을 따라 계속 북쪽으로 북쪽으로 올라갔다. 강원도 고성에 도착하니 금강산으로 가기 위해 전국에서 올라온 관광차들이 수 십대가 올라와 있었다. 오후 2시부터 금강산 출입국사무소에서 수속을 하고 금단의 땅 북측으로 들어간단다


모든 짐들이 검열을 받는데 핸드폰도 안 된다. 카메라도 기능이 있는 것은 안 된다. 어찌나 까다롭게 검열을 하는지 과연 이곳이 북한이구나 하고 긴장이 되었다.

그렇게 비무장지대를 통과 하여 북측 금광산 관광특구를 향해 간다. 


한걸음만 내 딛으면 이쪽은 남쪽 땅이요 저쪽은 북쪽 땅이란다.

고향이 북쪽인 사람들은 이곳을 지나는 마음이 어떠할까?

너무 어처구니가 없는것이  작대기하나  꼿아 놓고 휴전선 표시라 하니 어설프고 기막힌다


위를 쳐다보니 휴전선 철조망이 보이고 헌병들이 보초를 서있는 그 아래로 관광차들이 지나가고 있다. 길옆으로 북쪽 초병들이 약 2m간격으로 부동자세로 서있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산은 모두 민둥산이다.가이드 말이 북한은 아직 나무로 불을 때서 밥을 짓고 방을 따뜻하게 하다보니 나무가 남아나지 않는단다.


의문이 풀리지 않는 가운데 외금강호텔에 도착하니 남측 현대아산 직원들이 박수로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호텔에 여장을 풀고 조금 쉬었다가 저녁을 먹고 금강산 호텔로 이동하여 그곳 극장에서 가무단공연을 보았다‘


방송에서 보던 북한 아가씨들이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반갑습니다”

노래를 시작으로 남쪽 가곡 이며 흘러간 옛 노래들을 구성지게 불러주었다.

모두 흥겹게 따라 부르며 그 순간은 북측 남측 다 잊어버리고 흥겹게.1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르게 북한 가무공연이 끝났다.


밖으로 나오니 밤공기가 상쾌하고 하늘엔 별들이 총총하다

아이들처럼 별을 세어보며 그곳이 북한이라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았다

.

반 백년 세월이 가로막혔던 곳이라고는 전혀 생각이 되지 않았다.

어디선가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노래소리가 들리는 곳을 따라 가보니 북측 아가씨들이 막걸리를 팔고 있었다. 북한 막걸리 맛이나 보자하고 같더니만 막걸리 한 컵에 2000원이란다.

 

안주는 고기 와 양파를 끼워 한 줄에 2000원. 세계에서 제일 비싼 물가가 아마 금강산 특구일 듯.


건너다보이는 마을에 불빛이 새어나오는 것으로 보아 사람이 살고 있는 것은 분명 한데 북한 주민들은 구경조차 할 수 없는 곳이 금강산 특구가 아닌가 싶다.

 

고향이 이곳이면 한걸음에 뛰어갈 수 있는 지척에 두고 못가는 심정은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30일 아침 호텔에서 뷔페식으로 아침을 해결하고 구룡폭포로 출발했다.

어제 비가 와서 구룡폭포 관광이 될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비온 뒤 구룡폭포는 더욱 장관이라고 했다.뻐스로 이동하여 30분정도 구불구불한 산길을 올라 목란관 식당 앞에 도착했다

 

앞을 보니 산은 안개에 덮여 있었다. 이 안개 속에서 구룡폭포를 볼 수나 있을까 걱정하며 모두들 산으로 향했다. 구룡폭포보고 상팔담을 구경하고 1시 까지 목란관 식당으로 모이란다.

 

길은 험하지 않아 앞 서거니 뒷 서거니 하며 주변을 둘러보며 구룡폭포를 향해 올라갔다. 우리 한국의 산야 어디가나 신비롭다.

올라 갈수록 안개가 한치 앞을 분간하기 조차 힘들게 더 짙어졌지만 어렵게 여기까지 왔으니 꼭 보고 가야지 하고 천천히 올라갔다.


두 번 다시 올수 있는 곳도 아니고 천천히 우리일행은 서로 살펴주며 올라간다. 먼저 올라간 사람들이 함성을 질러 쳐다보니 정말 살아있는 룡이 하늘로 오르는 것 같은 구룡폭포의 장관이내 눈앞에 펼쳐졌다.

 

어떤 말로 표현할까? �아지는 물줄기가 장엄하기 그지없었다.

“어떻게 저렇게 높은 곳에서 저런 물줄기가..?”

 

하고 터져 나오는 입을 다물 수 없다. 사진으로나마 몇 장 담아보려 했으나 짙은 안개 때문에 사진에는 그 장관을 담을 수가 없었다. 다음은 상팔담으로 올라갔다. 아슬 아슬 철다리에 한사람씩 오르도록 되어있었다.

 

 천천히 한사람씩 오르기를 30분, 어렵게 정상. 상팔담에 올라섰으나 그곳은 안개는 더욱 심해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안개가 겉히면 혹 좋은 모습을  볼수 도 있을 거라는 말에 친구와 둘이 바위에 자리 잡고 앉아 기다렸다.

 

기다린 보람이 있어 잠깐 잠깐씩 이지만 안개가 지나가는 사이로 상팔담비경 들을 엿볼 수 있었다.


내려가는 길에 북측 가이드가 말을 걸어왔다.

“남쪽 어디 메서 왔습네까?”

처음대화라 망설여졌지만 부산서 왔다고 하니까

“멀리서 오셨습네다.”

 

하고 친근하게 대답하며 부산에 있는 “해운대, 태종대” 도 참 좋다지요. 하고 관심을 보였다. 남자 분들께는 “선생님은 무슨 일을 하십네까?”

하고 묻기도 하고 어떻게 시간을 내서 올수 있었는지 의아하게 생각했다.

 

가이드는 대학을 나와서 그곳에서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 남측에서라면  훨씬 좋은 곳에서 일할 수 있다고 하니

깜짝 놀라며 “여기가 얼마나 좋습네까?” 하며 자부심에 긍지를 가지고 일한다고 정색을 했다.


상팔담의 8곳의 작은 연못은 물 색깔이 푸른 옥색이다.

상팔담을 돌아 구룡폭포로 떨어지는 물줄기를보고 내려와

목란관에서 그 유명하다는 평양냉면을 먹었다.

 

그런데 냉면에 메밀 부침이 나오고 참나물 김치에 만두가 두 쪽 나왔다. 옆 테이불에는 대구에서 왔다는 父.子 가 냉면에 불고기 한 접시 안주로 시켰다며 우리보고 한잔하겠냐고 권했다. 마다할 내가 아니지..

.

“한잔주세요” 하고 받으니 양주란다. 양주면 어떠하라 많이 마실 것도 아니고 한잔 얻어 마시는 건데 하고 받아 마시니 정말 꿀맛이다. 평양 냉면맛은 유명세와는 다르게 영 아니  였다. 우리 남쪽 어느 식당에서나 하는 냉면 맛이 훨씬 더 나은것 같았다

 

 

. 그런데  북쪽 아가씨가“ 냉면 맛있지요?” 하고 묻는데 맛이 없다고 할 수도 없어 그냥 맛있다고 하고 반도 못 먹고 남겼다. 냉면 한 그릇 값이 13달러였는데 북쪽 농민의 3개월 월급이란다

 

  평양냉면을 점심으로 먹고 삼일포로 향했다. 가는 도중에 중학교라고 하는 학교 건물을 지나갔지만  학생들은 보이지 않고 건물은 곧 허물어 질 것처럼 허술하기 짝이 없다.

 

 들녘을 지나가니 농민들이 모내기가 한창이었다. 그런데 관광버스가 지나가면 모두들 돌아서 등을 보이고 쳐다보지를 않는다. 밭에 일하던 농민도 돌아앉자 지나가는 관광차를 쳐다보지 않았다.

 

가이드 말이 일하다 돌아보거나 쳐다보지 못하게 하는 모양이라고.... 마음대로 남측 사람들을 쳐다볼 수도 없는 것이 북쪽 주민들의 모습이었다. 삼일포는 어느 왕이 이곳을 놀러왔다 경치가 너무 좋아 3일을 묵고 갔다고 삼일포라 이름 붙여졌다고 했다

.

남측에서 흔히 볼수 있는 인공 땜 수준도 아니고 흔히 볼수 있는 평범한 저수지수준이었지만 북측 가이드 자부심에 찬 삼일포 자랑은 끝이 없었다.  

삼일포 여행을 마치고 온천욕을 즐겼다.

 

현대 아산에서 금강산 여행에 피곤한 남측 관광객들을 위해 얼마 전부터

운영하게 된 온천이라고 한다.100% 온천수라는데 과연 물이 기가 막히게 좋았다. 온 정리는 옛날부터 온천이 유명한 곳으로  임금들 행차가 줄을 이었다는 명성에 손색이 없었다.

 

금강산 관광에서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온천물을 생각하며 마지막 밤 호텔로 돌아왔다

31일 만물상으로 향하는 길은 구비 구비 백 여섯 구비를 돌고 돌아 버스가 휴게소에 올라섰다. 버스에 앉아서도 아찔한 현기증이 느껴지는 것이 대관령이 아흔 아홉 구비 인 것을

....

일제시대에 길을 닦다가 못 끝내고 해방 후 완성했다는 길이지만 차 한대가 겨우 지나가는 길이라 양방 통행은 불가능 하다.  한길로 갔다 비켜설 곳도 없는 길을 따라 올라선 휴게소부터는 자기 힘으로 올라서야 한다.

 

길이 좁아 한사람씩 양손에 철다리를 잡고 한명씩 밖에 올라 가다보니 사진도 마음대로 찍을 수도 없다. 조금만  길이 막히면 아슬 아슬 직선으로 서있는 철다리를 붙잡고 절벽에 매달려 있는 꼴이니 자칫 잘못했다 간 큰일 난다.

 

어떤 할머니가 이렇게 위험한 곳을 끝까지 오르시는 사연을 들어보니 그곳에서 멀지 않는 곳이 고향이라서  정상에서 쳐다보기라도 하려고 그렇게 올라온다는 것이었다. 할머니 절박한 마음 느껴져 우리 일행 중 누구도 할머니를 재촉하지 않았다.

 

 자기 때문에 늦어진다고 뒷사람에게 미안해하는 할머니를 끝까지 도와주고 부추겨서 함께 올라서니 천성대 정상. 하염없이 둘러보고 있는 할머니.....

만 가지 모양이라고 만물상이라는데 바위 한개 라도 닮은 모양이 없는

귀 이한 모습들을 하고 있는 모양이 만물상이라는 표현 보다 더 좋은 말을 찾기가 어렵다.

 

어떤 노신사가 “난 반백이 되었는데 만물상 너는 그대로 이구나?” 하고

탄식을 한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고등학교 수학여행을 왔었는데 다시 왔다고 했다. 산은 옛 산 인대 물은 옛 물이 아니라는 말이 떠올랐다.

남 다른 감회로 눈가가 촉촉이 젖어있는 저 노신사는 아픔은 남다르게 느꼈을 것이다..


"사람이 잘살려면 첫째. 나라를 잘 만나고. 둘째는 지도자를 잘 만나고 .셋째는 부모를 잘 만나야 잘 살수 있다고 하였다." 북쪽사람에게 꼭 맞는말이다 생각....


더 보고 싶은 만물상도 뒤로하고 다시 버스에 올라 외금강호텔로 돌아와 써커스 곡예단을 구경하러 들어갔다.

방송에서 보았던 곡예사들이 줄을 타고 대나무에서 자유 자재로 춤을 추는 곡예는 정말 칭찬하고 싶었다.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할 수가 있을까 신기하고 기계와 같은 동작들을 보니 한편으로 얼마나 오랜기간 훈련을 했으면 저렇게 잘 할 수 있을까 하고 마음이 찡하기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그 곡예사들은 인민배우라는 호칭으로 우리 남측에 비교하자면 장관급 대우를 받는다고 했다. 그나마 다행이다 싶은 것이 마음이 편해졌다.“

잘가시라 다시 만나요, 우리의 소원은 통일 ” 노래들을 부르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 ..한 민족이 둘로 갈라져 있는 안타까운 현실이 가슴 아팠다.

남북 철도가 어서 개통이 되어 마음대로 오고 갈수 있는 날이 하루빨리 다가왔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후기: 난생 처음 이렇게 긴 글 적어보았습니다. 두서없이 쓴 글을 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봉선화